균형과 능력을 겸비한 교회찬양사역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와 오도된 역사의식을 주입시키는 사례들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상 / 2004년 8월호, 심포지엄 광고)

 

이미지 출처 : 파워포인트 클립아트

 

   ‘허공을 치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하였음, 설교가 가지는 예언적, 치유적, 교육적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설교는 그 영향력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복음 아닌 것이 교회를 지배하였고, 혹 교회는 많은 재산과 함께 비대하고 부요했을지 모르지만 설교의 능력은 상실한 시대였다. (설교의 영광의 시대는 계속 될 것인가! / 인터넷자료)

 

   위의 글들을 읽어보면, 얼마나 설교가 중요한지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계시>를 포함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찬양과 경배>에 연관시키는 부분이 낯설 수 있지만, <계시>와 <반응>적 차원과 <메시지 선포> 차원에서 이를 생각한다면 설교에 적용된 위의 부분을 적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의 부분을 심중에 두고 과연 <균형과 능력>이 겸비된 <찬양인도사역>에 대해 생각해 보자.

 

 

I. 신학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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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이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체계화시킨 학문이다. 물론 신학의 범위가 성서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과학과 역사학 그리고 윤리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된다. <찬양선곡>과 <인도 시 멘트>는 항상 성서를 그 중심으로 사용해야 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해석하고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찬양선곡은 단순히 코드 운용이나 교회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요즘 뜨는 곳이라고 해서 그 곡을 선곡하는 것은 안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기 개인의 느낌이 좋기 때문에 선곡되어서는 안 된다. 선곡 시 성서 전체를 꿰뚫는 그리고 그것의 이해를 돕는 신학적 지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올바른 신학적 지식은 <찬양가사>를 분별하고 해석하는 것의 길잡이가 된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에 있어서 신학의 부재는 찬양선곡 등.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든다. 특별히 이는 <기복신앙>과 관련되어 ‘예수 잘 믿으면 부자도 될 수 있다’라는 것에 초점지어 흐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이 젊은이 예배인도와 예배 흐름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물질 지향적> <성공 지향적> 사고관을 보게 될 때에 같은 맥락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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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에서는 ‘아나윔’(가난한 자들)을 ‘남은 자’로 해서 이룩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신약성서에 이르러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해 이룩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야기 있다면 이러한 <기복적 신앙>관이 얼마나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신학 가운데서도 성서신학의 부재가 문제이다. 찬양에 있어서 메시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가사>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성서이해)와 또한 시대적 상황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제대로 <찬양콘티>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찬양인도자를 통해 회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과 삶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신앙을 삶의 현장과 연결시켜주는 <찬양>이 부족하다.

 

 

2. 교회론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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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중심의 교회론은 문제이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교회 성장을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이해하는 교회론은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종교개혁 이후에도 별로 변화하지 않고 있다. 이는 장로교 보수신학을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의 교회론이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교회론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론은 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과 맞물려 교회 성장론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를 통해 1970년에는 놀라운 교회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교회성장론을 통해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농촌과 공단지역 교회의 소외를 심화시켜 교회의 계층화를 자극하였다. 그 뿐 아니라 교회가 점차 보수화하고 개인 구원에 강조점을 두면서 한국교회는 점차 ‘탈사회적’ 집단인 종교집단으로 변모해 갔다. 이는 결국 교회가 성장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나머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1980년대 이후 <교회 성장>을 멈추었던, 한국교회의 정통 예배음악의 틀을 깬 <찬양과 경배 사역>을 통해 한국교회는 다시 필요에 의한 <교회성장의 엔진화>를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과 경배 사역>을 통한 정신이 흘러가기 보다는 <뜨는 노래> <뜨는 찬양 인도법> <뜨는 악기>등 순간적이고 피부적인 방향과 요구 속에 많은 교회가 습득과 결과를 보길 원했다. 지난 <찬양과 경배 사역>을 보자면, 긍정적 시각은 성육신화, 현대화, 젊은이의 언어와 문화로의 배려, 상황화인데 비해, 부정적인 시각은 여흥적 분위기, 한국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서구형 스타일, 복음화보다 교인화를 위한 비즈니스식 시도, 세대 간의 계층화로 볼 수 있다. <찬양과 경배 사역>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교회 중심의 교회론 대신 교회를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역사적,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하는 새로운 교회론이 <찬양팀>과 특별히 <찬양인도자>에게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선포 되어져야 하는 <찬양>의 중심 주제라는 전제하에 그 주제들은 첫째,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선언, 둘째 하나님의 통치하심, 셋째, 회개, 넷째,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종말을 선포한다 함은 이땅의 삶과 이후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지금 이 세계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통합되어 있기에 이 세계의 모순을 외면한 채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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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교회란 역사의 삶 속에서 임재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그의 뜻을 신앙으로 분별하는 사람들이 자기 혼자만의 구원과 축복이 아니라 이 역사를 살아가는 이웃 모두와의 공동운명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공동체이다. (신학적 교회론)

 

 

3. 역사관의 부재

 

이미지 출처 : http://goo.gl/HH9Tm

 

   마지막 또 다른 문제는 <역사의식>의 결여이다. <찬양인도> 가운데 예언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이 부분을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많은 교회 찬양인도자들>에게 적용시킴은 현실론적으로 조금 안 맞을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물을 엎지른 것이나 어른이 물을 엎지른 것이 <결과론>적으로 같기에 또한 이를 알아야 하기에 나누어 본다.

   격변하는 사회에 살면서 한국교회의 <찬양인도시간>은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북핵 문제와 탈북자 문제라든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라든지 그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닌 자기 선호의 미디어 정보를 통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성장 속에 제대로 된 <성서한국적 교육>이 우리 가운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복음을 통해 상황을 보는 눈이 떠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현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땅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에 편입시키려고 한데 비하여 지상의 왕국을 지향한 왕권은 이를 분리시키려 하였다. 오늘의 많은 <교회 찬양팀-찬양인도자>들이 이 예언자의 전통을 따른다면 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끌어옴이 마땅할 텐데, 오히려 이를 분리시켜 이원화하고 있다. 성과 속, 천국과 이 세상, 교회와 죄 많은 세상을 구분하면서 주로 전자들에게만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언적 기능은 하나님이 그의 통치 아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시려는 구원사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데, 찬양에 그것이 결여될 때 결국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다.

 

 

4.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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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한국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교회로 변모하고 예언적 기능을 회복한 찬양과 경배가 선포되어지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국의 5만 7천여 개 교회의 찬양팀(원) 하나하나가 새로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자료 출처: 청년목회자연합(Young2080) 에즈37 『우리교회 우리예배를 위한 E Dr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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