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제자들의 복음 증거(6장 12~13절)와 귀환 후 보고(6장 30절) 사이에 등장하는 요한의 순교는 복음을 담당한 자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요한의 애매한 죽음, 로마식 처형 방식, 주변의 강압에 따른 헤롯의 사형 결정, 매장 등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면서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마땅한 일이며 또 주의 제자의 증거이기에 감사할 일입니다.
17~20절 헤롯은 자신의 불의한 결혼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요한을 원수처럼 여겼지만, 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 알았기에 그를 죽이자는 헤로디아의 청은 거절했습니다. 그의 말에 번민하면서도 달갑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옥 문은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잘 이해했고 권위를 인정했고 자신에게 적용도 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않은 것입니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실천하고서(죽이지 않음) 불순종의 불씨는 남겨뒀습니다. 나는 절반의 순종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허물을 드러내는 뼈아픈 지적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19,24절 헤로디아는 원하는 것은 다 얻어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남편도 바꾸고 자식도 이용했습니다. 그것을 방해하면 선지자도 죽였습니다. 내 자녀를 향한 열심이 사실 내 기대를 채우고 싶은 욕망의 표현은 아닙니까? 자녀들의 신앙보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을 더 중시여기고 있지 않은지 엄히 살펴보십시오. 학업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선지자를 참수하도록 딸을 사주한 헤로디아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21~28절 구하는 것은 다 줄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리던 헤롯 왕이 자기 세 치 혀 하나 다스리지 못한 채 어린 딸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딸과 손님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가둬두면, 언젠가 그 말씀을 아예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의 감정이 회개는 아닙니다. 죄와 단절하고 떠나지 않으면 그 죄가 나를 가두고 지배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