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0 ~18] 약속과 율법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율법에 우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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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구속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 언약과 율법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유업은율법이 아니라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미리 정하신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기 위해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과 경륜과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고 율법의 저주 아래 다시 들어가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녀가 되고 성령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율법준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역사요 복임을 잊지 말자!

 

 




 






 

 

 



 

 

[갈라디아서 31 ~ 9] 율법의 행위냐 믿음이냐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논증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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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경험을 통한 논증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성경을 통한 논증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을 따라 계속 살아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 것이 율법의 행위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인지 생각해보라고 호소한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율법준수가 의롭게 되는 길이고 복음과 자유를 완전하게 한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결국 자기 자랑과 만족을 추구하다가 육체로 귀결되는 신앙의 퇴보와 퇴락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 언제든 형식과 전통만을 중시하는 율법주의나 사람의 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육체의 소욕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내 소욕이 아닌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참 백성이다.

 

 




 






 

 

 

 



 

 

[갈라디아서 211 ~ 21] 의롭게 되는 길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하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어떤 특정한 관습이나 규범을 좇아 유대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모든 요구들을 상대화시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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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외식에 대한 책망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람을 의식하면 외식의 덫에 빠지기 쉽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피한 베드로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베드로의 처신은 또 다른 외식과 오해를 야기했고 복음의 진리에도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지위를 훼손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앗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깨트리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 말씀의 빛 앞에서 모순되고 오해와 오류를 낳는 언행은 없는가?

의롭게 되는 일이 율법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의롭게 된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만 아니라 삶 전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죄와 율법과 세상( 6:14)에 대해 죽고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다. 이것은죄와 율법과 세상에 지배받던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이전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21 ~ 10] 복음을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게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언급하며 자신이 전해온 복음이 사도들을 통해서 받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재차 논증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자신이 아는 복음에 더해 준 것이 없고 도리어 자신의 사도직과 사역을 인정한 사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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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유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사역을 인정함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

 

 

 

바울은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역을헛되게’(2) 만드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할례를 포함한 율법준수를 강요함으로써 복음이 주는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의 속박 아래 가두려는 거짓 형제들의 간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순종의 책임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려는 가르침과 사상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한 분별의 책임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율법이든 전통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그것들의 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제시한(2) 복음에 제한을 가하거나 요구를 부과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의 사도직과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인정하고 그를 존중하며 교제의 악수를 청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역할과 사명이 상이할 뿐 복음과 가르침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의 화합과 일치는 그들이 서로 타협하고 인준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맡았다’) 결과였다. 나도 하나님께서 내 기대나 지식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때 잘 수용하고 인정하고 있는가?

 

 




 












 


 

[갈라디아서 111 ~ 24] 그리스도의 계시와 바울의 행보

 

 

 

 

  바울은 사도직에 이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힙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기 전후의 자신의 행적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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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기원, 그리스도의 계시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의 과거 행적과 회심 그리고 소명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수리아 유대 교회들의 반응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님과의 만남으로 복음의 계시와 이방 선교의 사명을 충분히 확신한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거나 사도들의 확증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부르시고 보내신 분의 뜻(16)에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떠났다. 바울은 지난 행보를 통해 자신이 철저히그리스도의 종’(10)으로서 부르신 분의 뜻대로 살았음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의 뜻을 듣고 묻고 응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건 없다. 처음 나를 부르실 때의 감격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사랑으로 오늘도 주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는가?











 

 

 

 



 

 

[갈라디아서 11 ~ 10]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起源)을 밝힙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왜곡하는 대적자들에 맞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고 수호하며,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설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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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기원과 문안 인사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계와 경고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고, 따라서도 안 된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한다. 예수님을 말하지만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은혜를 말하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믿음을 말하지만 예수님만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른 복음이다. 이 세상의 기호와 가치에 영합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퇴색시키고 변질시키는, 이 시대의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

복음은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을 부르신 분의 말씀만 전했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만을 살았다. 목회자와 선교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혹시 사람들의 인정이나 환심을 사려고 행동하고 있진 않는가?




 







 

 

 



 

 

[시편 2222 ~ 31] 버림받았던 자의 노래

 

 

 

 

   버림 받았다는 탄원으로 시작했던 시인의 노래는 이제 찬양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온 세상 모두가 자신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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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자에서 예배자로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예배자에서 초대자로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우리의 절규를 들으신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하고, 수수방관하는 듯이 느꼈다. 하나님마저 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오해였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멸시하거나 외면한 적이 없으시며 우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문제는 중도에 포기하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지레 단념하는 것이다. 혹시 그렇게 중단한 기도 제목들은 무엇인가?

 




 







 

 

 



 

 

 

[시편 221 ~ 21]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1~21)와 부활(22~31)을 예표하는 시로, 신약에서 자주 인용됩니다. 시인은 의롭게 살았으나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너무 원통한데, 하나님마저 외면하는 것 같아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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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버림받음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음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우리의 불평을 받아주신다. 시인은 일체의 관계에서 단절된 채로 외롭게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6~8). 징그러운 벌레 취급을 받는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살 길이 없는데도 가만히 계시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 애꿎은 하나님께 화풀이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없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어떤 말이라도 받아주시고, 말없이 지지해주신다.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내 서러운 마음 쏟겠는가? 내 속 마음과 사정을 주님께 모두 말씀드리자!

 




 






 

 

 



 

 

 

 

[시편 191 ~ 14] 창조신앙과 율법신앙

 

 

 

 

 

   시편 19편은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을 노래하는 찬양시(1-6)와 율법신앙을 노래하는 지혜시(7-14)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은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지혜인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을 노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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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노래하는 자연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율법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율법이 제 아무리 완전해도 우리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온전한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 죄인이다. 대충 지키면서도 잘 지키는 척하니 죄인이다. 제 허물 모르고 남 비판하기 십상이다. 율법을 알면서도 딴짓을 한다. 주의 은혜를 구할 때,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내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것이 된다.

 

 




 






 

 

 



 

 

 

[요엘 3 1 - 21] 내가 다 심판하리로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만국 심판과 두로, 시돈,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여호와의 날이 심판을 받는 재앙의 날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최종적인 승리를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파워포인트 클립아트

 

 

 

 

 

이방민족의 심판과 유다의 구원

1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5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7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8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11

사면의 민족들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17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유다의 구원

18

그 날에 산들이 다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19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20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한다. 아무리 자기 죄를 부인하고 심판의 사실을 외면한다 해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여호와의 날은 재앙과 심판의 날이 되기도 하고, 회복과 구원의 날이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장차 임할 심판 날에 영광과 승리를 누리도록 거룩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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