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Mark) 6장 30절 ~ 44절] 자기 백성을 먹이시다  

 

    갈릴리 지역의 큰 무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오병이어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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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의 보고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큰 무리를 가르치심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먹을 것을 주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큰 무리를 먹이심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목자 없는 양’ 같은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십니다. 음식을 드실 시간도 없고, 쉴 겨를도 없으시지만 주님을 보기 위해 몰려온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목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배만 채웠습니다. 광야를 유리하는 굶주린 양 떼와 같은 무리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마가복음(Mark) 6장 14절 ~ 29절] 요한의 죽음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 중간에 요한의 죽음을 삽입합니다. 요한의 투옥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표지였듯이, 의로운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끝날지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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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의 오해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세례 요한의 투옥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세례 요한의 죽음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진리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죄가 삶을 지배합니다. 헤롯(안티파스)은 요한을 의인으로 알고 그의 가르침을 즐거워하지만, 진리의 대한 관심이 헌신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 사이 죄는 그의 탐욕과 명예를 이용해 그를 지배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의인을 죽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경읽기와 묵상이 생각과 책상에서 머물지 않고 생활과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마가복음(Mark) 6장 1절 ~ 13절]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능력 있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고향 사람들의 배척으로 고향에서는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이후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각 마을로 파송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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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척받으심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권능을 행하지 않으심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제자들을 파송하심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선포와 능력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보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에 주목하고, 예수님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메시아를 거절합니다(요한복음 1장 46절; 7장 52절). 나는 말씀묵상과 순종을 통해 내 경험과 지식의 틀을 벗어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있습니까?  

 

 

 

 

  [마가복음(Mark) 5장 35절 ~ 43절]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특별한 말이 아닌 ‘일어나라’(달리다굼)는 일상적인 말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이 놀라운 이적은 예수님이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며, 그분께 인간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이길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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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기만 하라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소녀야 일어나라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죽음 앞에서 사람은 슬퍼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시에는 장례식 때 피리 부는 사람을 고용하고 일부러 우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슬픔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서 애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모든 행위는 죽은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아직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불신을 애통해하며 복음 전하기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마가복음(Mark) 5장 21절 ~ 34절]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치유의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댄,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자를 고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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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심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댄 여인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갔지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은 그들 중에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손을 댄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손을 뻗습니까?  

 

 

 

 

  [마가복음(Mark) 5장 1절 ~ 20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갈릴리 건너 이방 지역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탄의 종노릇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나라인 것과 그분이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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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자신들을 쫓아낼 권세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능력에 대한 귀신들의 지식은 제자들의 무지와 좋은 대조를 이루지만, 그 지식이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나 경배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내 앎과 고백은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거라사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들에게는 귀신 들린 자에게 일어난 회복보다 경제적 손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구원보다 재물을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두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됩니다. 나는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한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일에 내 재물과 재능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그가 누구이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이어서 네 가지 이적들이 소개됩니다. 마가는 이러한 이적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큰 광풍을 잠잠케 하심으로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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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광풍으로 죽게 된 제자들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믿음을 갖도록 요구하심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인생이라도 환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도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황을 극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냐고 말씀드리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보다 잘못을 나무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돌봐주지 않으신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12 ~ 20] 누렸던 복을 회복하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고, 자기 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속아 하늘의 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연약한 공동체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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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중에도 전해진 복음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거짓교사에게 넘어간 교회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의 연약한 몸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파되었다. 바울을 괴롭혔던 질병은 복음을 듣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시험에 빠뜨릴 만큼 위중하고 심각한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바울의 질병 때문에 복음을 거부한 사람은 없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빚진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자기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고민과 한계를 뛰어넘는다. 하나님께 묻고 사안을 분별하기도 전에 처지를 비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자! 

 












 

 

 

 



 

 

 

[갈라디아서 41 ~ 11] 종입니까? 아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초등학문과 율법 아래 종노릇 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자들은 다시는 율법과 초등학문 아래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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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서 아들로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다시 종이 되고자 하느냐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과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 하던 자들을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 아들 됨의 지위와 자격은 내가 애써온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속량의 대가로 내어주신 아들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었다면 나는 땅에 사는 동안 세상의 초등학문과 율법의 노예가 되어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율법의 요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연약함과 진리를 찾고 좇지 못하는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늘 나는 그 사랑으로 주어진 영광스러운 신분에 걸맞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초등학문의 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 모든 가치들의 허망한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그것들을 동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 초등학문과 율법의 위치란 주인의 아들을 훈육하던 종들의 운명과 같아서 결국 아버지의 것을 상속할 아들을 주인으로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박한 초등학문 아래로 돌아가려 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분노에 귀 기울이자! 혹시 필요한 곳에 사용하라고 주신 돈, 명예, 권력, 지식 등이 오히려 섬김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잃게 하는 사탄의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는가?

 

 




 







 

 

 

 



 

 

[갈라디아서 319 ~29]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이미지 출처 : 파워포인트 클립아트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기능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신분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율법은 죄를 죄로 규정하는 수단일 뿐 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18)과는 달리, 중보자의 손(‘모세’)으로 제정하신 것이다. 언약보다 후에 더해진 것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만 효력이 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죄의 형벌인 사망을 선고함으로써 죄를 깨닫게 해 구원과 구주의 필요성을 깨우쳐준다. 날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내가 잘못하는 일은 없는지 점검하는 것은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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