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0 ~18] 약속과 율법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율법에 우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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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구속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 언약과 율법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유업은율법이 아니라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미리 정하신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기 위해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과 경륜과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고 율법의 저주 아래 다시 들어가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녀가 되고 성령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율법준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역사요 복임을 잊지 말자!

 

 




 






 

 

 



 

 

[갈라디아서 31 ~ 9] 율법의 행위냐 믿음이냐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논증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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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경험을 통한 논증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성경을 통한 논증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을 따라 계속 살아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 것이 율법의 행위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인지 생각해보라고 호소한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율법준수가 의롭게 되는 길이고 복음과 자유를 완전하게 한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결국 자기 자랑과 만족을 추구하다가 육체로 귀결되는 신앙의 퇴보와 퇴락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 언제든 형식과 전통만을 중시하는 율법주의나 사람의 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육체의 소욕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내 소욕이 아닌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참 백성이다.

 

 




 






 

 

 

 



 

 

[갈라디아서 211 ~ 21] 의롭게 되는 길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하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어떤 특정한 관습이나 규범을 좇아 유대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모든 요구들을 상대화시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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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외식에 대한 책망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람을 의식하면 외식의 덫에 빠지기 쉽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피한 베드로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베드로의 처신은 또 다른 외식과 오해를 야기했고 복음의 진리에도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지위를 훼손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앗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깨트리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 말씀의 빛 앞에서 모순되고 오해와 오류를 낳는 언행은 없는가?

의롭게 되는 일이 율법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의롭게 된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만 아니라 삶 전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죄와 율법과 세상( 6:14)에 대해 죽고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다. 이것은죄와 율법과 세상에 지배받던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이전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21 ~ 10] 복음을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게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언급하며 자신이 전해온 복음이 사도들을 통해서 받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재차 논증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자신이 아는 복음에 더해 준 것이 없고 도리어 자신의 사도직과 사역을 인정한 사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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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유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사역을 인정함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

 

 

 

바울은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역을헛되게’(2) 만드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할례를 포함한 율법준수를 강요함으로써 복음이 주는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의 속박 아래 가두려는 거짓 형제들의 간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순종의 책임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려는 가르침과 사상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한 분별의 책임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율법이든 전통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그것들의 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제시한(2) 복음에 제한을 가하거나 요구를 부과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의 사도직과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인정하고 그를 존중하며 교제의 악수를 청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역할과 사명이 상이할 뿐 복음과 가르침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의 화합과 일치는 그들이 서로 타협하고 인준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맡았다’) 결과였다. 나도 하나님께서 내 기대나 지식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때 잘 수용하고 인정하고 있는가?

 

 




 












 


 

[갈라디아서 111 ~ 24] 그리스도의 계시와 바울의 행보

 

 

 

 

  바울은 사도직에 이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힙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기 전후의 자신의 행적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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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기원, 그리스도의 계시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의 과거 행적과 회심 그리고 소명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수리아 유대 교회들의 반응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님과의 만남으로 복음의 계시와 이방 선교의 사명을 충분히 확신한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거나 사도들의 확증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부르시고 보내신 분의 뜻(16)에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떠났다. 바울은 지난 행보를 통해 자신이 철저히그리스도의 종’(10)으로서 부르신 분의 뜻대로 살았음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의 뜻을 듣고 묻고 응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건 없다. 처음 나를 부르실 때의 감격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던 사랑으로 오늘도 주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는가?











 

 

 

 



 

 

[갈라디아서 11 ~ 10]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起源)을 밝힙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왜곡하는 대적자들에 맞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고 수호하며,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설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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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기원과 문안 인사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계와 경고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고, 따라서도 안 된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한다. 예수님을 말하지만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은혜를 말하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믿음을 말하지만 예수님만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른 복음이다. 이 세상의 기호와 가치에 영합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퇴색시키고 변질시키는, 이 시대의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

복음은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을 부르신 분의 말씀만 전했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만을 살았다. 목회자와 선교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혹시 사람들의 인정이나 환심을 사려고 행동하고 있진 않는가?




 






 

 

 
 성경요약 (요한복음 21장)




(1)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1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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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베랴 호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베드로의 말에 7명의 제자가 함께 디베랴 호수로 갑니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육지로 올라온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조반을 함께 먹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다시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로 갔지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처럼 다시 그들을 찾아가셨고, 말씀 한마디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우리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지금 제자들은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3년 반을 예수님 따라 다녔는데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도 무엇 하나 건진 것이 없습니다. 한때는 능력을 받아 병자를 낫게 했습니다. 예전에는 노련한 고기잡이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숯불과 생선구이를 차려주십니다. 질책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2) 내 양을 먹이라. (15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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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이나 물으십니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모든 증언은 참이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두 적는다면 기록된 책으로 쓸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을 통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완전히 회복하시고 새 사명을 맡기십니다. 또한 그가 순교할 것과 사랑하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회복의 기회를 또다시 주십니다.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과거의 상처를 재현하고 반복하여 기억나게 하시지만, 그 목적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잘못했습니다’라는 자책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합니다’라는 희망의 언어를 이끌어내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회복의 기회들을 기억하며 헛되이 하지 맙시다.
   사명의 기회를 또다시 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제자입니다. 이쯤이면 포기할 법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어주시고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주십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주님의 양을 맡기시며 돌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주님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성경요약 (요한복음 20장)




(1) 살아나시다. (1 ~ 10)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려 줍니다. 두 제자도 무덤으로 가서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보았지만 아직 부활하신 것은 알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마리아는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고, 빈 무덤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단정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2)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11 ~ 18)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본 것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줍니다.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당시 여성은 법정에서 증인의 자격이 없을 정도로 무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인(누가복음 8장 2절)이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녀를 부활의 첫 목격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가장 마지막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을 뿐 아니라(19장 26절), 가장 먼저(1절)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3)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19 ~ 23)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두려워하며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평강을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죄 사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평화의 선물뿐 아니라 평화의 사명(使命)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 세상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세상이며,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파송은 평강의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예수님께 받은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4) 도마가 의심하다. (24 ~ 29절)


 


 디두모라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기에 자신이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도마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의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의 말을 의심하며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합니다. 내 안에 의심이 생길 때, 또는 의심하는 다른 이들을 볼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정직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고백하며 더 큰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5) 이 책을 기록한 목적 (3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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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편 2222 ~ 31] 버림받았던 자의 노래

 

 

 

 

   버림 받았다는 탄원으로 시작했던 시인의 노래는 이제 찬양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온 세상 모두가 자신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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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자에서 예배자로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예배자에서 초대자로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우리의 절규를 들으신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하고, 수수방관하는 듯이 느꼈다. 하나님마저 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오해였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멸시하거나 외면한 적이 없으시며 우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문제는 중도에 포기하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지레 단념하는 것이다. 혹시 그렇게 중단한 기도 제목들은 무엇인가?

 




 







 

 

 



 

 

 

[시편 221 ~ 21]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1~21)와 부활(22~31)을 예표하는 시로, 신약에서 자주 인용됩니다. 시인은 의롭게 살았으나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너무 원통한데, 하나님마저 외면하는 것 같아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미지 출처 : 파워포인트 클립아트

 

 

 

 

 

 

하나님께 버림받음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음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우리의 불평을 받아주신다. 시인은 일체의 관계에서 단절된 채로 외롭게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6~8). 징그러운 벌레 취급을 받는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살 길이 없는데도 가만히 계시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 애꿎은 하나님께 화풀이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없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어떤 말이라도 받아주시고, 말없이 지지해주신다.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내 서러운 마음 쏟겠는가? 내 속 마음과 사정을 주님께 모두 말씀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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